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죠. 말이 있고 음악이 있고 움직임이 있는 공연은 대체로 비장애인의 전유물로 여겨지는데요, 이런 생각을 깨부순 국립극단의 연극 <햄릿> 관람 후기를 여러분과 나눕니다.
제가 관람한 날은 ‘접근성(배리어프리, barrier-free)공연*’이 진행되었습니다. ‘접근성’이라는 단어를 머리에 입력해 두고 공연장을 둘러보니 음성 해설 수신기 대여, 문자 안내 서비스, 수어** 통역 안내원 등 그동안 인지하지 못했던 안내문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공연장에서 볼 수 있으리라 생각지 못했던 시각장애인 안내견도 자연스럽게 공간에 어우러졌죠.
*접근성 공연: 장애 유무와 관계 없이 관람할 수 있는 공연
**‘수화’가 말하기에 초점을 둔 용어라면, ‘수어’는 말하기, 쓰기, 읽기 등을 포함한 의사 전달 방법을 통칭 (출처: 수어 속에 나타나는 한글의 자취를 찾아서, 국립한글박물관 소식지 2020.1.제 78호)
모두를 위한 안내.
공연장 내 안내 방송은 비상구 같은 일반적인 안전 수칙뿐만 아니라 층별로 계단이 몇 개인지까지 상세하게 설명했고(“2층은 8개, 3층은 9개의 계단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안내 직원들은 박수 소리로 각자의 위치를 알렸습니다.
접근성 회자의 경우 안내 사항이 수어 통역과 자막으로도 제공되었습니다.
수어 통역.
뉴스 화면 한쪽에 보이는 수어 통역사처럼 한 사람이 모든 대사를 통역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웬걸요, 이날은 총 다섯 명의 수어 통역사가 무대에 올랐습니다. 장면과 대사에 맞는 풍부한 표정과 열정적인 손짓으로 무대 중앙에서 열연하는 배우들과 호흡하며 작품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햄릿에서는 무대 오른쪽에서 각 배역과 짝지어진 수어 통역사들이 통역을 진행했는데요, 다른 작품의 경우 무대에서 배우와 함께 움직이며 연기하기도 했대요. (무대 위 수어 통역사의 모습이 궁금하시다면 아래 영상을 참고하세요!)
🦮시각장애인 관객이 국립극단 [열린 객석]을 만나러 갑니다 (youtube.com)
자막.
수어 통역사 머리 위로 설치된 모니터에는 실시간 자막이 나왔습니다. 공연 시작 전 관람 안내부터 배우의 대사, 물소리, 빗소리, 바람 소리 같은 효과음까지 모두 자막으로 표기되었습니다. 수어가 있는데 왜 자막을 또 제공하는지 궁금해서 찾아보니, 수어는 음성 언어와는 다른 고유의 어법 체계가 있어서 음성 한국어로는 정보를 100%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음성 해설은 수신기가 필요해 체험해 보지 못했지만, 대신 집으로 가는 길에 OTT에서 영화를 하나 골라 ‘한국어 화면해설’을 들어봤습니다. 예전에 <눈에 선하게>라는 책과 함께 화면 해설을 소개해드린 적이 있는데요, 넷플릭스, 웨이브 등 OTT 서비스에서 오디오 ‘한국어 화면해설’이나 한국어(청각 장애인용 자막) 같은 옵션을 설정하시면 소리와 자막으로 제공되는 화면 해설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OTT 플랫폼과 콘텐츠에 따라 제공 여부가 다릅니다.)
그동안 꽤 많은 공연을 봤지만, 접근성 공연을 관람하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접근성을 고려한 공연이 보편적으로 제공되지도 않거니와 비장애인 관객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여러 장치가 공연 관람에 방해가 될 것 같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한 적도 있었죠. 하지만 직접 경험해보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수어 통역사의 표정과 손동작이 극의 분위기를 잘 전달해 몰입도를 높인 것은 물론이고, 등장인물의 어려운 이름들을 실시간 자막으로 확인할 수 있어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가끔 귀로 대사를 놓쳐도 자막이 있어 금방 따라잡을 수 있었고요.
접근성 공연은 수어 통역사를 섭외하고 음성해설기를 제공하고 자막을 제공하는 등 일반 공연보다 제작비가 훨씬 더 든다고 합니다. 모든 공연을 이렇게 제공하기는 어렵지만, 앞으로 이런 공연이 늘어나면 더 많은 사람들이 공연을 함께 즐길 수 있겠지요. 현재는 접근성 공연에도 비장애인 관객의 비중이 더 크다고 해요. 아직까지는 극장을 찾는 장애인 관객의 수가 많지 않기에, 접근성 공연을 관람해보고 장애인 지인에게 소개하면 좋겠죠? 여러 작품들이 접근성 공연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번 가치알랩을 보고 관심이 생기셨다면, 다가오는 가을에 공연장을 한번 찾아보시면 어떨까요?
공연에 관심 있으신 분들을 위한 정보:
아르코·대학로예술극장 홈페이지에서는 ‘접근성’을 옵션으로 설정해 공연을 검색할 수 있습니다.
https://theater.arko.or.kr/product/performance?q=OTQ5ZWNjMTMxZDU1NDA2YzlkMGVkZWIzZDZhN2ZjMDE%3d
국립극단 홈페이지에서도 공연별 접근성 회차 운영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www.ntck.or.kr/ko/performance/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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