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6.07
벌써 4년이 지났다. 지난 2007년 3월 2일, 김철수 사장이 하늘나라로 떠났다. 김철수 사장이 떠난 자리에는 'CEO가 되어버린 기타리스트를 보냅니다'라는 조화가 남겨져 있었다.
3월 2일, 새벽 3시에 울린 전화 한통..
그 날 새벽 3시경이었다. 필자의 집으로 전화가 울렸다. 순간 눈을 떴다. 김철수 사장이 운명했다는 소식이었다. 순간 멍했다. 우두커니 거실에 앉아 있었다. 김철수 사장에 대한 추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다.
새벽 5시경, 택시를 타고 회사로 향했다. 벌써 한 직원이 나와있었다. 새벽에 잠이 안와서 그냥 회사로 나왔다고 했다. 김철수 사장의 소식은 나중에 회사에 도착해 들었다는 것이다. 그 직원은 그 날 새벽에 김철수 사장의 운명을 직감했던 것일까.
아침에 경영진이 출근했다. 필자는 회사장으로 치르자고 주장했다. 전례가 없던 일이었던 터라 잠시 논의와 준비가 필요했다. 그렇게 안철수연구소에 첫 회사장이 치러지게 됐다. 필자는 매일 고인이 안치된 병원 영안실로 향했다. 3월 2일이 금요일이었으니 월요일 아침 발인까지 지켜본 셈이다.
조문을 온 직원들은 모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눈물을 흘리는 직원도 많았다. 기자들의 조문도 이어졌다. 사실 기자들이 과거 CEO의 조문을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김철수 사장은 당시 전 CEO였다. 오랜 암투병으로 자리에 물러난지 오래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김철수 사장은 달랐다. 기자들의 조문행렬은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계속 이어졌다.
모두의 눈시울을 뜨겁게 한 故김철수사장의 열정
첫 날, 기자들이 한꺼번에 몰렸다. 한 여기자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대학 동문 후배 기자였다. 다른 기자들도 눈시울을 적셨다. 김철수 사장은 기자들과도 재미있는 추억이 많았다. 기자들과 격의없이 소주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기자들만을 위한 밴드공연도 있었다. 김철수 사장이 중심이 돼 만든 밴드였다. 보컬과 노래는 안철수연구소 직원이었다. 김철수 사장도 기타 연주와 더불어 노래도 했다.
사실 김철수 사장이 다시 기타를 들게 된 것은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사보에 당시 김철수 부사장이 과거 고교시절 미8군 무대에 선 밴드 출신이라는 것이 실렸다. 그러자 직원들은 기타 연주를 듣고 싶다고 요청했다. 김철수 사장은 경영목표 달성을 하면 직원들에게 연주를 들려주겠다고 했다. 결국 김철수 사장은 2004년 겨울 약속을 지켰다. 그것도 직원들과 결성한 '안랩 올스타즈 밴드' 공연이었다.
2005년 3월, 안철수 박사가 스스로 경영에서 물러나자, 김철수 사장이 제2대 CEO로 취임했다. 김철수 사장은 그 전부터 안철수연구소를 기존 V3 위주에서 제품의 다각화는 물론 해외시장 개척 등 엄청난 변화를 주도했다. 김철수 사장은 부사장 시절 7개월간 일본의 허름한 숙소에서 직원들과 동고동락하며 법인설립을 하기도 했다. 그런 김철수 사장이었기에 직원들도 형처럼 따랐다.
다신 들을 수 없게 된 CEO실의 기타선율을 추억하며..
CEO가 된 김철수 사장은 힘들 때면 기타가 즐거움이었다. 일요일에 출근할 때면 간혹 CEO실에서 기타 소리가 들리곤 했다. 안철수연구소의 CEO란 수많은 사람들은 지켜보는 자리라서 참으로 힘들다. 김철수 사장은 기타 연주로 일주일의 스트레스를 풀곤 했던 것이다. 경영에 오케스트라와 같은 하모니를 접목했다. 그리고 또 매일 열심히 일에 몰두했다. 그러나 갑작스런 암 선고는 CEO가 된 기타리스트를 앗아갔다.
그랬다. 김철수 사장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직원들도, 기자들도 울었다. 그 어느 누구보다 눈물을 흘렸던 사람들은 남겨진 밴드였다. 눈물을 너무 흘릴까봐 미리 모여 눈물을 흘리고 오기도 했다. 그러나 영전 앞에서 또 울었다. 어떤 멤버는 통곡을 하기도 했다. 당시 미국에 있다가 급거 귀국한 안철수 박사는 김철수 사장 영전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당시 비행기가 없어 발인식에 참석했던 것. 김철수 사장의 과거 영상이 흐르자 여러명의 직원들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 날은 하늘도 슬펐는지 이슬비가 내렸다.
한편, 조문 3일째 날이었다. 모 언론사 데스크 부장이 기자와 함께 조문을 왔다. 필자가 김철수 사장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언론사 부장은 CEO가 된 기타리스트의 죽음에 깊은 애도를 했다. 그리고 기자에게 기사를 써보라고 했다. 필자는 김철수 사장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더 들려주었다. 메일로도 알려주었다. 한 밤 중에 옛 일을 기억하니 마음 속에 눈물이 흘렀다.
그 기사가 바로 아래의 내용이다. 다시 그 기사를 봐도 불현듯 그 날이 스친다. 김철수 사장은 그렇게 떠났지만 기타는 남았다. 안철수연구소 직원들도 남았다. 김철수 사장이 남긴 유산은 안철수연구소를 이제 판교 사옥 시대로 열어주었다. 지금도 최백호의 노래 '낭만에 대하여'와 '산타나'의 연주가 아련히 들리는 듯 하다. 다시 노래와 연주를 들을 수 없지만...
* 그 당시 기사를 그대로 인용해본다.
"CEO가 된 기타리스트를 보내다"
[CEO&Life]평생을 음악과 함께한 낭만파 故김철수 안硏 대표
지난 2일 새벽. 우리시대의 한 기타리스트가 우리곁을 떠나갔다. 보안업계 2세대 CEO 중 대표주자였던 김철수 前안철수연구소 대표가 암 투병 중 별세한 것. 향년 53세. 이제 한창 일할 나이였기에 그를 떠나보내는 국내 IT 및 보안업계의 안타까움은 더욱 컸다.
김철수 대표는 지난 2002년 한국IBM에서 안철수연구소에 COO(최고운영책임자)로 합류한 뒤 회사조직의 선진화 시스템 도입과 글로벌 경영체제의 초석을 닦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더욱이 안철수 의장으로부터 CEO 바통을 이어받은 지난 2005년 3월부터 매분기 사상 최대 실적을 달성하는 등 그의 경영능력은 업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신화를 일궈낸 CEO 김철수'. 그런 그를 만든, 그를 항상 따라다녔던 수식어가 바로 '기타리스트'다. 그에게 기타와 음악은 그의 삶 자체였다. 실제 김 대표는 재임시절 경영을 예술로 승화시켜 '예술경영'의 리더십 CEO라는 평가를 받았다. 6개의 전혀 성격이 다른 줄(현)이 뭉쳐 고운 화음을 만들어내는 기타 연주. 그것은 조직, 시장, 인재 등 여러 경영환경을 조화롭게 다룰 줄 알아야 하는 경영과도 코드가 맞기 때문 아닐까.
그는 CEO 재직 당시 직장인 그룹사운드인 '잭밴드'의 리드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다. 당시 김 대표의 지론은 각기 악기 연주능력보다 멤버의 조화를 이룰때 최상의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 김 대표는 평소 밴드 후배들에게 “밴드 음악도 사회 생활과 같아서 혼자서 만들어낼 수 있는 소리가 아니다”며 “잘난 사람 한,두명과 그 들러리들의 모임이 되어서는 안된다”며 멤버들의 조화가 최우선이라는 것을 항상 입버릇처럼 강조했다.
그는 병세가 악화돼 CEO직을 내놓은 이후에도 종종 잭밴드 연습장에 나가 기타를 치곤했다. 병마와의 싸움 와중에도 기타에서 손을 뗄 수 없었던 것. 그가 운명을 달리한 뒤 장례식장에서 그의 영정 옆에서 끝까지 그를 지켰던 것도 고인이 직접 만들고 애지중지했던 일렉트릭 기타다. 그가 얼마나 음악과 기타를 사랑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마지막 음악인생을 함께 한 잭밴드 멤버들. 옆에서 항상 그를 지켜봤기에 슬픔은 더욱 남달랐다. 그가 운명한 당일 장례식장을 찾은 음악 벗들은 조문시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미리 근처 주점에 모여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도 슬픔을 가시기엔 너무나 부족했나 보다. 조문 내내 이들이 흘린 눈물바다가 주위를 안타깝게했다. 그의 장례식장에 잭밴드 멤버들이 보낸 조화에는 'CEO가 되어버린 기타리스트를 보냅니다'라는 문구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더욱 가슴을 메이게했다.
안철수연구소 직원들도 기타리스트 김철수를 떠올리는 사람이 적지 않다. 김 대표가 안철수연구소 CEO 재직 당시 그의 사장실 CEO 의자옆에는 항상 김대표 자신의 기타와 파란색 간이침대가 있었다. 밤잠을 설쳐가며 열정적인 경영을 하면서도 일요일 오후 혼자 사무실에 나와 기타 연주를 하던 모습을 기억하는 직원들도 아직까지 많다.
실제 그는 직원들을 위해 행사에서 기타연주를 해주기도 했다. 음악을 좋아하는 직원들과 '안랩 올스타즈 밴드'를 결성해 2004년 말 직접 공연을 했던 것. 안철수연구소 사보 '보안세상'에 처음 김 대표의 과거 기타리스트 사실이 소개된 이후 직원들로부터 공연을 해달라는 열화에 김 대표는 경영목표 달성시 공연을 하겠다고 밝혔고, 그 약속을 결국 지킨 것. 2005년 말 기자송년회 당시에도 그는 잭밴드 및 안철수연구소 직원들과 함께 무대에 섰다. 그때 기자들은 몰랐다. 그게 대중앞에선 마지막 공연이라는 걸 그는 알았을까.
사실 김 대표는 음악과 평생을 같이했다. 만 4살때 피아노를 배웠다. 이후 10년 이상 피리, 트럼본, 재즈기타 등 각종 악기를 섭렵했고, 중학교 때 처음접한 기타에 심취해 프로 뮤지션의 길로 나섰다. 대학진학을 위해 고군분투할 나이에 김철수 대표는 미8군부대 근처 클럽에서 프로밴드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생전에 기자들과 만나 "당시에서 밴드생활을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사회라는 세상으로 처음 내디딘 그곳에서 생활 형편은 그리 좋지 않았지만 그래선지 마음만은 더 따뜻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과의 만남과 음악이 있었기에 오늘날까지 그 시절이 너무도 소중한 시간으로 기억된다"고 회상하곤 했다.
그렇게 평생 음악을 사랑하고 일과 사람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故 김철수 대표. 그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은 그가 마지막까지 애정을 불살랐던 안철수연구소 임직원들이 함께 했다. 안철수연구소는 평소 그의 회사에 대한 애정을 기리기위해 벤처업계로는 드물계 회사장으로 장례를 치뤘다.
김 대표의 경영능력을 인정해 그를 믿고 CEO직을 맡겼던 안철수 창업자도 급거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달려와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안철수 의장은 5일 거행된 영결식장에서 "고인의 회사에 대한 애정과 믿음을 잊지말고 뜻을 받들어 세계적인 안철수연구소를 만들자"고 복받쳐 말했다.
하늘도 슬퍼서일까. 2007년 3월 눈바람 흩날리던 날. 그는 그렇게 한줌의 재가 돼 우리곁을 떠나갔다. 그렇게 평생 함께했던 기타 하나 둘러맨 채...그러나 그의 음악인생은 이제 다시 시작일지 모른다. 영원의 시간 속에서..하늘 저 어딘가에 그가 생전 좋아했던 '산타나'의 연주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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