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1.21
한 대학에서 특강을 한 적이 있다. 매주 최고경영자(CEO)를 초빙해 현장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프로그램이었다. 흥미롭게도 강의실을 가득 메운 학생들의 전공 분야가 인문계와 이공계가 절반씩 섞여 있었다. 융합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의도적으로 만든 강좌라고 한다. 고등학교부터 문과와 이과로 나뉘는 우리의 교육 현실에서 보면 신선한 시도다.
마침 주제가 정보기술(IT)이 일으키는 사회 변화였다. 모바일·클라우드·소셜네트워크·사이버 보안·프라이버시 등과 같은 시대적 키워드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특히 지금은 고인이 된 스티브 잡스가 인문학과 기술이 교차하는 것을 설명하는 사진을 띄우자 탄성이 터져나왔다. 바로 그 강의장의 모습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었다.
기술혁신을 통한 급격한 IT성장
돌이켜 보면 과거 20~30년에 걸쳐 IT는 우리의 업무 생산성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뿐 아니라 IT의 역할은 더 이상 보조적 수단이 아니라 사업의 중심으로 이동했다. IT가 일으키고 있는 변화의 미래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삶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우리의 라이프스타일과 사회 환경을 바꾸고 있다.
<사진출처. 네이버 블로그>
IT는 기술혁신을 통해 급격한 성능 향상, 보급 확대, 가격 하락의 사이클을 보여줬다. 한 예로 과거 대학 전산실에서 사용하던 컴퓨터보다 현재 개인들이 가지고 다니는 컴퓨터가 더 강력해지는 데 불과 한 세대도 걸리지 않았다.
컴퓨터와 인터넷의 덕택으로 정보를 찾는 것은 자유로움 그 자체다. 이제는 정보를 알고 있는 것보다 정보를 찾는 노하우가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모바일 환경은 공간의 제약마저 없애고 있다. 태블릿과 스마트폰은 인간적인 터치로 기계적 장벽을 줄여가고 있다.
카메라는 어떤가. 이제는 매우 보편적인 기능이 되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수많은 사진이나 영상을 만들어낸다. 그뿐 아니라 그렇게 생성된 콘텐트는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급속도로 퍼져 나간다. 그런가 하면 무선인터넷을 대표하는 와이파이(WiFi), 위치를 알려주는 GPS 기능을 집어넣는 것은 아주 적은 비용으로도 가능하다.
즉 지능적이고 스마트한 것을 만드는 일은 경제적 현실성 여부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단지 얼마나 의지를 갖고 진지하게 실험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러한 환경 변화로 인해 우리가 생각하고 소통하는 방식, 생활 문화, 그리고 교육 시스템에 큰 변화가 예상된다.
이러한 변화는 산업시대처럼 후진국에서 선진국을 일방적으로 따라가는 형태로 진행되는 것도 아니다. 지역적으로나 세대별로 생각하는 방식과 문화가 다를 수밖에 없다. 감내할 수 있는 소비 수준도 천양지차다. 따라서 같은 기술이라고 해도 적용되는 형태는 다를 수 있다.
중국의 채소 씻는 세탁기 개발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점
중국의 가전 회사인 하이얼은 유독 중국 농가에서 세탁기 고장 신고가 자주 접수되는 점에 주목했다. 그 원인을 분석해 보니 채소 찌꺼기가 기계에 끼어서 오작동하는 것이었다. 세탁기를 옷이 아닌 채소를 씻는 데 사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이얼은 고객을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얼마 후 채소를 씻는 세탁기를 개발했다. 가위 발상의 전환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한국 음식문화의 특성을 고려한 김치냉장고를 개발하지 않았는가.
글로벌 기업 인텔에서는 인류학자가 제품 개발에 참여한다. 특히 후진국에서 기술이 어떻게 적용될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한다고 한다. 인텔이 어떤 기업인가. 전자제품 속의 부품을 만드는 반도체 기업이다. 보통 사용자들은 직접 접하지 않는 제품이다. 그런 회사가 이러한 준비를 오래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이 바로 인문학과 기술 융합이 필요한 시기
<사진 출처. 조선일보>
그런데 IT 강국이라고 자부하는 우리나라는 어떤가. 빠른 IT 인프라와 디지털 정보화 측면에서는 우리가 앞선 측면이 있다. 하지만 가위 혁명적이라 할 스마트 시대를 주도할 만한 준비는 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지금은 기술이 기능적 수준에서 벗어나 우리의 삶 속에 유연하게 적용되는 스마트 시대다. 바로 인문학과 기술의 융합이 필요한 때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융합은 거대 담론만으로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융합은 자신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서로가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는 자세에서 시작된다. 이때 자유로운 사고와 소통은 창의력의 원천이다. 거창한 구호를 앞세우는 데 익숙했던 과거의 방식으로는 이렇게 소프트하고 유연한, 그리고 세밀한 접근은 낯설고 새로운 도전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공감대를 만들 수 있다면 우리의 잠재적 역량과 더불어 새로운 기회를 창출해 낼 것이다.
* 이 칼럼은 2011.11.21 일자 중앙일보에 실린 칼럼입니다. Ahn
'AhnLab 칼럼 > CEO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CEO Column] 자신의 꿈을 포기한 대가? (0) | 2020.04.23 |
---|---|
[CEO Column] ‘백인 남성’만 참여하는 회의의 문제점 (0) | 2020.04.23 |
[CEO 칼럼] 기업이 수학·과학자 영입하는 시대 (0) | 2020.04.23 |
[CEO 칼럼] 잡스가 남긴 최고의 선물은 '도전' (0) | 2020.04.23 |
[CEO 칼럼] 한국의 스티브 잡스들을 위하여 (0) | 2020.04.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