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0.12
1980년대, 미국 유학 시절 졸업 논문 작성을 앞두고 있던 때였다. 논문의 방향과 실험은 거의 정해졌고, 한 권의 책으로 완성하는 일만 남겨두고 있었다. 시간 내에 최대한의 완성도를 내기 위해서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다.
애플과의 첫 만남, 첫 PC는 아직도 소장 중
고민 끝에 가난한 유학생 신분으로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당시 선풍적으로 인기를 끌던 애플의 맥(Mac) 컴퓨터와 레이저 프린터 세트를 구입하기로 한 것이다. 학교 컴퓨터에 담겨 있던 내용을 옮기는 작업, 새로운 컴퓨터를 익히는 시간 등을 감안하면 위험 요소도 적지 않았다.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직관적인 사용자 인터페이스라서 별도의 학습 시간이 필요 없었다. 그래프와 도식이 많이 필요한 전공이었음에도 크게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고 언제든 고품질의 출력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도교수도 놀랄 정도로 빨리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이것이야말로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결정 중의 하나였다.
이것이 애플과 나의 소중한 인연의 시작이었다. 20년도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이 컴퓨터를 소장하고 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내 삶의 조력자였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는 수많은 혁신적인 발명품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었다. 컴퓨터, 통신 기기, 오디오 플레이어, 태블릿 등 각종 기기는 물론 멀티미디어 콘텐츠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디지털 라이프를 재구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스티브 잡스가 늘 ‘고객의 시각’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고객이 되어 어떤 것을 만들면 좋을까 고민했다. 고객은 복잡하고 어려운 제품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모든 기술적 요소를 단순하게 만들었다. “단순함은 복잡함보다 더 어렵다. 어떤 걸 단순하게 만들기 위해서, 당신의 생각을 선명하게 만들기 위해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내가 단시간에 졸업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이런 철학 덕분이다.
한국의 스티브 잡스들에게 고함
우리나라에도 잠재적인 스티브 잡스들이 있다. 이들에게 필요한 건 무엇일까. 가장 근원적인 것은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사는 자세다. 우리는 무엇엔가 기대어 살기를 원한다. 학력이나 경력과 같은 배경, 조직의 시스템, 타인의 인정 등. 그러나,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스티브 잡스와 같이 진솔하게 자신이 꿈꾸는 세계를 그려가는 자세다. 꿈꾸던 세계를 실현 가능하도록 해주는 것이 소프트웨어다.
한편, 그들이 ‘한국의 스티브 잡스’로 성장하려면 그만한 토양이 전제돼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잡스는 융합, 소프트웨어, 수평적 비즈니스 모델의 키워드로 우리나라에 충격을 주었다. IT와 인문학의 창의적인 융합을 이끌어내고, IT 산업의 주도권이 소프트웨어에 있다는 명제에 사회적 공감대를 이루고, 수직적 비즈니스 관행을 벗고 수평적 비즈니스 모델을 정착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숙제로 남았다. 이는 교육, 제도, 산업 구조 등 다각도에서 풀 일이다. 아울러 실패하더라도 도전 자체의 가치를 인정하는 사회 분위기도 필요하다. 김홍선 안철수연구소 대표이사
* 이 칼럼은 2011.10.10 일자 한국일보에 실린 칼럼입니다. 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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