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7.16
흑사병.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끔찍한 전염병 재앙이라 할 수 있다. 현대에도 에이즈(AIDS)라는 죽음의 전염병이 있지만 흑사병에는 미치지 못한다. 흑사병은 중세시대의 사회 경제적 변화뿐만 아니라 인간의 심성까지 바꾸는 최악의 재앙으로 기록된다. 흑사병이 창궐하던 1348년에서 1350년 사이에 흑사병으로 인해 사망한 사람은 최대 35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흑사병 이후 인류 최악의 재앙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 지난 1월 말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 일명 다보스포럼)’은 CEO 연례보고서를 통해 ‘인포데믹스(InfoDemics)’라는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 인포데믹스는 정보(Informatin)와 전염병(Epidemic)을 합성한 용어로 정보전염병이라고 할 수 있다. 인포데믹스는 정보의 확산으로 발생하는 각종 문제와 부작용을 말한다.
즉, 위험에 대한 잘못된 정보나 행동에 관한 루머들이 인터넷, 휴대전화 등과 같은 IT기기나 미디어를 통해 빠르게 확산되고 근거 없는 공포나 악 소문을 증폭시켜 사회, 정치, 경제, 안보 등에 치명적인 위기를 초래하는 것이다. AI(Avian Influenza, 조류인프루엔자), 사스(SARS,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등과 같은 사례가 대표적이다. 특히 전 세계를 하나로 연결하는 인터넷의 발달은 자유로운 정보의 공유라는 순기능이 있는 반면에 역으로 컴퓨터 바이러스나 악소문이 순식간에 확산돼 인류의 큰 재앙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셈이다.
웹2.0과 UCC(User Created Contents, 사용자 제작 콘텐츠)로 대변되는 인터넷 민주주의 시대를 맞아 사용자 참여와 공유가 더욱 활발해짐에 따라 새로운 인류의 위기가 도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컴퓨터 바이러스, 초강력 태풍보다 무서운 존재
2003년 1월 25일. 우리나라는 전국적으로 인터넷망이 며칠간 마비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벌써 만 3년이 지난 사건인 소위 ‘1.25 인터넷 대란’이다. 발생 시기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토요일 오후여서 망정이지, 주중 근무시간이었다면 우리나라는 전쟁보다도 참혹한 최악의 혼란과 위기를 맞게 되었을 것이다. 인터넷 뱅킹, 인터넷 쇼핑 등 모든 비즈니스가 마비되고 관공서를 비롯해 기업, 가정 등 모든 생활이 올 스톱 되었을 것이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안보 등 모든 분야가 대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1.25 인터넷 대란의 주범은 컴퓨터 악성코드의 일종인 웜(바이러스)에 의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이백 자 원고지 한 장도 안 되는 데이터 수준의 작은 컴퓨터바이러스가 순식간에 인류를 공포와 위기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우리나라가 유독 피해가 컸던 것은 인터넷이 발달되고 IT인프라의 보안관리가 소홀한 것도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아직 바이러스에 의한 피해액을 계량화한 범정부 차원의 통계제도는 없다. 하지만 1.25 대란이 발생한 해인 2003년 우리나라의 정보보안 사고 피해금액이 7조 8500억 원에 달한다고 보안전문가들은 추정한다.
이는 초강력 태풍이 전국적으로 보통 4조 원 정도의 피해를 준다고 가정할 때 우리가 모르는 사이 A급 태풍 2개가 전국을 강타해 피해를 준 것과 맞먹는 규모의 피해가 정보보안 사고로 발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특히 과거 컴퓨터바이러스가 자신의 실력을 뽐내기 위한 장난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았다면 최근 경향은 범죄조직이 돈벌이를 위해 바이러스, 스파이웨어, 트로이목마, 피식, 해킹 등과 같은 다양한 형태의 사이버 복합공격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판 해킹을 통한 온라인게임 피해, 피싱에 의한 인터넷 금융사고, 웹사이트를 통한 개인정보 유출 등은 가정이나 기업, 정부 등에 재산상 손실은 물론 궁극적으로 국가의 존립이나 안보 자체에도 심각한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인포데믹스인 것이다.
AI의 공포, 전 세계를 강타…사망자 속출, 위기감 고조
AI(조류인플루엔자)의 공포도 만만치 않다. 지난 2월 10일 경기도 안성에 우리나라에서 여섯 번째로 고병원성 AI가 발생했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AI의 위험지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전북 익산, 충남 아산 등 전국 AI 발생 지역의 양계장 등 농가와 농장에서 기르는 수백만 마리의 가금류(닭, 오리 등)가 처분을 당해야 했다. 농가의 막대한 피해는 물론이고 국민들이 AI 위험으로 인해 닭고기 치킨 등을 먹는 것을 꺼려해 2차적인 비즈니스 손실액도 엄청난 규모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최근 AI 공포가 확산되고 있다. 유럽 아프리카 동남아 등 각국에서 AI로 인한 사망자가 발생하고 있다. AI 전파경로로 알려졌던 철새 이동경로를 벗어난 지역에서 발병한 사례가 이미 영국에서 확인됐고, 아프리카에서는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영국 정부는 위기감 속에서 농장의 가금류를 모두 처분하기도 했으며 비상대책위원회를 통해 후속대책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지난 1월 헝가리에서 AI가 발생한 데 이어 영국에서도 발생하자 프랑스와 네덜란드 등도 자국의 AI 발생 위험 점검에 긴급 나서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EU(유럽연합)는 27개 회원국 전문가 대책회의를 열고 대책을 논의하는 등 AI 확산과 방역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나이지리아에서는 지난 1월 여성 1명이 AI에 감염돼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인간이 사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문가들은 에이즈(AIDS, 후천성면역결핍증) 등 각종 전염병이 만연하고 있는 아프리카에 AI까지 확산될 경우 살인 변종 바이러스가 나타난다면 최악의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지난 2003년 이후 AI에 의한 사망자는 165명에 이르고 있다. AI가 전 세계 농가와 축산물 비즈니스에 악영향은 물론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는 공포가 되고 있는 것이다. AI가 사람들에게 심어준 부정적 소문과 인식은 인터넷과 통신을 통해 급속도로 확산되는 인포데믹스 현상의 대표적 사례가 되고 있다.
인포데믹스가 개인이나 사회에 미칠 수 있는 영향
인터넷의 발달과 대중화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하나의 지구촌 공동체를 급진전시키고 정보의 자유로운 공유를 가능하게 한 반면에 인포데믹스 문제를 가속화하는 가장 무서운 주범이 되고 있다.
인터넷의 익명성을 악용한 악소문 유포나 사이버폭력, UCC 동영상을 통한 명예훼손 등이 사회문제화 되는 것이 다반사가 되고 있다. 심지어 정치 구도를 바꾸거나 비즈니스를 좌우하기도 하는 등 무서운 존재가 되고 있다. 인터넷은 특별한 여과장치가 없다보니 사실 확인과정을 거치는 고전적 미디어 시대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지난 2005년 말 영화배우 트위스트 김은 ‘자신의 예명을 도용한 음란사이트 개설로 인권과 퍼블리시티권을 침해당했다’며 해당 음란사이트 운영자와 포털사이트 등 20곳을 상대로 16억 55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낸 바 있다. 트위스트 김이라는 예명을 그대로 도용한 음란사이트로 인해 그는 엄청난 오해와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고 급기야 법적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트위스트 김은 그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오히려 악성 루머는 증폭되었고 법정의 판결이 내려지기까지 절망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셈이다. 결국 지난 1월 말 그는 법원으로부터 그동안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승소 소식을 들었다. 자신의 예명을 도용해 음란사이트를 운영한 자에게 1000만원의 벌금이 선고된 것이다.
그러나 그간 격어야 했던 고통에 비하면 너무나 미약하다. 과거 그가 식물인간이나 다름없는 시간을 보내야 했던 것을 감안하면 조금이라도 명예를 회복한 것에 그나마 만족해야 할지 모른다. 트위스트 김 사건은 한 사람이 인포데믹스에 의해 얼마나 고통을 입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아무리 결백을 주장해도 한번 인터넷에 유포된 악성 루머는 확대 재생산되면서 순식간에 한 사람의 인생을 파괴해 버린다. 최근 연예인의 연쇄 자살 사건도 인터넷 악소문이 직간접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유명인의 자살을 모방해 동조자살을 일이키는 베르테르 현상이라는 사회적 문제까지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인포데믹스는 인류 공통의 문제,
위험 관리에 우선순위와 투자 필요
인포데믹스는 인류 역사상 가장 무서운 흑사병이나 다름없다. 중세의 흑사병은 사라진지 오래다. 그러나 인포데믹스는 이제 시작단계다. 앞으로 얼마나 더 위협적인 복합 도전으로 발전해 인류를 위험에 빠뜨릴지 모르는 일이다.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문명의 이기는 사람들을 편리하게 하지만 인포데믹스라는 인류 최악의 위험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위험을 막기 위해서는 단지 문명의 이기를 만들고 사용하는데만 신경을 쓸 것이 아니라 리스크에 대한 안전의 문제부터 먼저 설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인포데믹스가 개인이나 특정 집단에 국한된 것이 아닌 모든 인류의 공통 문제임을 인식해 공론화하고 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모색도 해야 한다. 인간 존엄성 회복이나 인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각계각층의 노력이 필요할 때다. 이는 인포데믹스의 위협으로부터 인류의 생존을 보장받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인포데믹스의 창궐을 방지할 수 있는 법제도적 정비와 개선도 이루어져야 한다. IT의 발전에 비해 법제도는 전혀 따라주지 못한다.
이미 인터넷과 IT기술은 빛의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데 정치 헤게모니에 집착한 과거의 권력은 여전히 부족사회의 족장과 같이 구태를 벗지 못하고 있다. 인포데믹스는 이러한 과거 권위주의 세력에게 불화살이 되어 그들의 생명도 앗아갈 것이다. 인류의 대재앙, 인포데믹스는 전 세계 곳곳을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 지식정보사회에서는 과거와 같이 위험을 감수하고 발전에만 치중하던 방식과 달리 위험을 관리하고 방지하면서 나아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나라는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이후에야 위험 관리의 중요성을 깨달은 적이 있다. 우리가 현재 처한 인포데믹스의 위기는 위험 관리에 얼마나 더 많은 투자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지가 관건인 것이다. 미국이 본토가 공격당한 초유의 국가위기인 9.11 테러의 교훈에서 사이버 안보를 비롯한 사회 안전망에 우선순위를 두고 투자와 노력을 집중하고 있는 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인류 역사상 최악의 흑사병으로 다가온 인포데믹스로부터 자신과 가족 그리고 인류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백신, 즉 인간의 존엄성 회복에 지구촌 가족들이 함께 나서야 한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안전하고 행복한 세상을 물려줄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기 때문이다.
글 : 안철수연구소 커뮤니케이션팀장 박근우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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